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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정희考...만주 신경군관학교 예과생도 모집공고의 건

 
박정희가 일계(日系) 군관모집요강을 받들어(?) 읽은 뒤 자격이 부달(不達)함을 깨닫고 혈서를 보내 지원을 청원한 바가 사실인지 우리는 좀더 확인할 필요가 있다. 앞에서도 언급했듯이 만주 신경군관학교에 일계(日系) 학생들이 최초로 입학한 것은 1940년 1월이었다.  자료를 찾아본 결과 일계(日系) 군관모집요강은 만계(滿系)의 경우와는 완전히 달랐다.

즉, 만계(滿系)의 경우 지원자가 거의 1만명에 육박한 까닭에 치열한 공개선발의 관문을 통과해야 했으나, 일계(日系)는 일본육군사관 정규채용 선발에서 탈락한 자 중 육군성의 추천을 받은 자만 입학이 허용되었으므로 애초에 박정희가 일계(日系) 군관모집요강을 받들어(?) 읽을 필요조차도 없으며, 어디까지나 박정희는 방원철이나 박임항처럼 만계 지원자 모집요강에 해당하는 신분이었다

자료를 찾아보니, 만주 신경군관학교의 일계(日系) 지원자 모집공고는 陸滿秘 공문 제1019호 (昭和 14年 11월 28일자)에 최초로 기안된 사실이 있다. 昭和 14年이면 1939년 11월 28일자를 말하는 바, 박정희가 3월에 받들어 읽은 일계 군관모집요강이란  타임머신을 타고 12월로 가서 가져오지 않은 이상 완전히 허구에 날조임을 알 수가 있다.
이 문서를 읽어보면, 일계(日系) 만주국군군관예과생도 지원자들은 어떤 자들이 지원할 수 있었고, 어떤 과정을 통해 선발되었는지 확인이 가능한데, 정규 일본육군사관학교 채용고시에서 탈락한 자들 중 비교적 우수한 자들을 만주국 치안부와 일본 육군성 교육총감부의 협의하에 지원이 가능하도록 모집요강을 만들었다고 되어있다. 즉, 박정희하고는 아무 상관이 없는 모집요강이 되겠음.

강덕6년(1939년) 8월에 기안된 만주군관학교예과생도 모집책자의 모습은 다음과 같이 생겼다. 박정희는 이 책자를 보고, 그해 10월에 시험을 쳐서 합격하고 1940년 4월에 2기생으로 입교한다.

나머지 자료는 계속 찾고 있으므로 확인될 때마다 별도의 포스팅을 올릴 예정..

by 無名氏 | 2009/11/06 23:02 | 인.물.평.론 | 트랙백 | 핑백(1) | 덧글(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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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inked at 친일 빠돌이의 초 마이너 블로.. at 2009/11/08 00:04

... 순간 '가설'에서 '역사적 사실'로 그 지위가 급상승한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무명씨의 여러 반박(http://allthekind.egloos.com/2471161, http://allthekind.egloos.com/2470622)을 보면 민족문제연구소가 제기한 기사가 진정성이 있는, 가치있는 사료인지 ... more

Commented by 我幸行 at 2009/11/06 23:20
재미있습니다.
Commented by Fedaykin at 2009/11/06 23:43
결론 : 조작이다?!
Commented at 2009/11/06 23:51
비공개 덧글입니다.
Commented by 악어의눈물 at 2009/11/06 23:57
중요한것은 혈서 내용에 일본군에 충성 한다는 내용이 아니고 만주군인으로 만주국에 충성한다 했지 일본국에 충성한게 아니지 않을까요

中略)一人前の滿洲國軍人として滿洲國のため延いては祖國のため何で一身の榮達を欲しませう、滅私奉公、犬馬の忠を盡す決心でこざいます
(중략) 한 명의 만주국군인으로서 만주국을 위해, 나아가 조국을 위해 어떠한 일신의 영달을 바라지 않겠습니다. 멸사봉공, 개와 말처럼 충성을 다할 결심입니다
Commented by 無名氏 at 2009/11/07 00:10
문장 자체는 아무 의미가 없는 것입니다. 예전에 김성수나 조만식의 연설문에 가필해서 멋대로 기고문을 만들었던 매일신문 기자들도 있지 않았습니까? 아예 통째로 대필해서 올린 글도 많았고요.
Commented by Mediocris at 2009/11/07 10:46
악어의 눈물님의 지적은 아무 의미가 없지 않는 것으로 판단됩니다. 박정희의 편지에서 조국이라는 단어를 만주국이 아닌 (일본 : 편집자 주)로 해석하는 것은 해석을 넘어선 명백하고도 악의적인 왜곡입니다. 사료 해석은 역사를 사료 자체로 읽을 능력이 없는 사람들을 위한 것입니다. 조국이라는 말을 후세의 한국인이 제대로 읽을 능력이 없다고 보기 힘듭니다. 변명할 기회조차 없는 죽은 자의 내심의 의사까지 후세가 어떤 목적에 의해서 확대 해석할 권리는 추호도 없습니다. 단순히 조국으로 번역하고, 그것을 읽는 후세인 각자의 판단에 맡기는 것이 옳습니다.
Commented at 2009/11/07 00:11
비공개 덧글입니다.
Commented by 나야스 at 2009/11/07 08:30
1938년 4월이라는 것은 장창국 장군의 저서 <육사졸업생>에 근거한 것으로, 저는 이 시기가 학교 설립을 위한 준비작업이 본격 시작된 시점으로 보고 있습니다. 말씀대로 "학교가 39년 3월에 세워졌으니" 그 이전에는 어떤 작업도 할 수 없다고 한다면 38년 10월부터 39년 2월까지 시행된 입학시험도 치러질 수 없는 것 아닙니까?

학교를 세우자면 예산 마련부터 부지와 건물의 준비, 교수진 선정과 커리큘럼 준비 등 사전작업이 반드시 필요합니다. 이런 것들이 39년 3월에 종 땡 치고 학교 문 열면서 시작될 수 있는 건 아니죠. 그리고 38년 4월에 학교가 설립된다는 이야기가 나오지 않았다면 박정희가 어떻게 38년 5월에 지원서를 쓸 수 있습니까? 무명씨님은 38년 5월에 혈서를 썼다는 유증선의 증언을 신뢰하지 않으셨습니까?
Commented by 몽몽이 at 2009/11/07 09:54
두분이 다른 채널에서 더 이야기하신게 있으신건지 내용은 잘 모르겠지만...
39년 3월 이전에는 개교를 안 한 상태라니 몸이 가 있을 순 없는 것 아닌가요.
Commented by 無名氏 at 2009/11/07 11:15
그래도 신경군관학교가 1938년 4월에 설립되었다라고 말씀하신 것은 그래도 바른 표현이 아닐 것입니다. 설립과 개교를 분리해서 말씀하시는데, 관련 법규정이 개정된 것이 1939년 3월 10일이었고 군관학교 교칙이 만들어진 것이 그해 4월 1일입니다.

교칙도 없이 학교가 설립되는 거 보셨습니까? 무엇을 말씀하시고자 하는 것인지는 저도 잘알고 있습니다만.. 정히 그 취지를 말씀하시려면 "1939년 4월 1일에 군관학교가 설립된 것은 맞지만, 학생모집은 1년전부터 있었다"라고 얘기하셨더라면 오히려 이해가 잘 갔을 것입니다.

이 문제는 신경군관학교 학생모집을 언제했느냐가 밝혀지면 자연스럽게 해결될 질문입니다.
Commented by 나야스 at 2009/11/07 11:25
설립 준비라고 표현할 것을 제가 좀 잘못 표현한 것도 있기는 하겠습니다. 그래도 뜻은 통했다니 되었습니다.
Commented by 악어의눈물 at 2009/11/07 13:04
나야스/ 님은 1937년도 부터 신경군관학교 입학하라는 선전을 정일권이가 했다고 하는데요
말이 안되는 이야기죠 37년에는 신경군관 학교는 없었고 정일권이가 졸업한 봉천 군관학교는
있었지요 그럼 상식적으로 생각을 해보세요 정일권이가 자기 모교 냅두고 있지도 않은 신경
군관 학교를 선전 했다는것은 전혀 말이 안되지요

상식적으로 생각을 해보세요 38년 4월1에 교칙이 만들어지자 마자 바로 학생모집 선전에 나갔을까
요 교칙이 만들어 졌어면 이것저것 설립 준비하고 몇달후부터 학생 모집 선전을 하고 10월에
입학 시험을 치루었다고 보는게 정상적인 시각이 아니겠습니까

Commented by 악어의눈물 at 2009/11/09 18:45
나야스/
38년도 생도모집 공고는 1938년 9월 무렵 신경군관학교 모태인 중앙육군훈련처의 군관후보생
모집공고를 치안부 군형과(軍衡課)에서 채용공고 했다는 서류를 무명씨님이 찾았습니다

38년 5월 이라는 유증선의 증언은 거짓입니다
Commented by 나야스 at 2009/11/18 16:55
악어의 눈물//유증선의 증언을 신뢰한 것은 무명씨님입니다. 저는 애초부터 이번에 공개된 신문기사 쪽을 신뢰하여 유증선의 증언이 잘못되었을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Commented at 2009/11/07 11:09
비공개 덧글입니다.
Commented by 악어의눈물 at 2009/11/07 15:23
저는 친일파의 조건은 이렇게 생각합니다,
일제가 민족을 수탈하고 핍박 탄압하는 일에 앞장선 者, 일제를 등에업고 이익을 챙겨 영화를 누린
者, 헐벗고 굶주린 한민족을 돌보지 않고 일제에 기대어 축재한 者 , 일본제국주의의 내선융화 또는
황민화운동을 적극 주도한 者.

이런 자들이 친일파지 단순히 일본군 오장이상 계급, 고등문관을 지낸이들이 친일파라고 매도
하는것은 사리에 맞지 않다고 보아야 하지 않을까요

중국과 대만도 만주군관 학교 출신을 친일파라고 하지는 않습니다 그리고 혈서가 사실이래도
혈서에 일본인으로 자칭 했다고 하여 친일파라 하는것도 사리에 맞지 않다고 봅니다

일본인이 아닌 나는 대한제국인으로서 라고는 말할수가 없었지요 그 시절 군관학교뿐만 아니라
소학교 중학교 대학교 입학하는 사람은 대한제국인이 아닌 일본인 신분이었지 않습니까

일제시절 우리 조선인은 일본천황을 찬양하고 신사참배를 다 하였지만 친일파라서 그런게
아니듯이 군관학교에 입학할 목적으로 일본인으로 자칭해서 만주국과 만주군에 충성하겠다는
는 표현이 무슨 친일파입니까

우리가 요즘 취업시 다들 제출하는 자기소개서를 지원하는 회사에 충성 하겠다고 쓴다고
그게 회사에 진짜 충성을 해왔기 때문에 그렇게 쓰는것은 아니잖습니까
박정희가 일본인 충성 운운 한것도 마찬가지로 보면 되지 않을까요

참고로 그당시 일반적인 표현인, 일본인으로써 대일본제국의 무궁한 영광을 위하여 대일본 천황폐하
에게 목숨바쳐 충성 하겠다고 씃어도 그게 조선국민에게 고하는 글이 아니고 특정한 학교에 입학
하기위한 목적이라면 친일파라고 매도할수가 없다고 봅니다,

저리 안쓰고 일제시대에 나는 대한제국인으로써 대한제국의 독립과 대한제국인의 자유를 위해 한
목숨 다 바쳐서 투쟁하겠습니다 라고 쓰면 어떻게 될까요
.
Commented by 들꽃향기 at 2009/11/07 16:58
올리신 것은 잘 봤습니다만, 나야스님께서도 지적하셨듯이 당시 한인 지원자가 박정희만 있었던 것은 아닐지언데, 어째서 일제와 그 도구인 만주신문은 '평범한 소학교 교사'인 '박정희'를 집어다가 '조작' 혹은 '오류'를 저지른 것일까요?

이번 포스팅에도 이 문제에 대한 해답은 없으시기에 여쭈어보고자 합니다. 양해부탁드립니다.
Commented by 악어의눈물 at 2009/11/07 18:42
그 당시 소학교 훈도래도 지금의 대학 교수급의 사회적 위치이지 않았습니까
군관학교에 지원하게된 실제 속사정이야 어찌 되는지는 모르지만 훈도자리를
버리고 군관학교에 지원한 박정희가 중학교 졸업생인 다른 조선인이나 중국인
들 보다는 선전에 이용해 먹기에는 딱 맞지 않았을까요

박정희가 훈도시절에 한글을 가르치고 민족정신을 교육시키다가 일본훈도들과
다툼이 있었고 본인의 적성에도 맞지 않아서 군관학교에 갔다는 증언도
많이 있지요
Commented by Mediocris at 2009/11/07 19:04

박정희 혈서 기사, 조작 의혹 너무 짙다

만주신문의 혈서설 기사를 사실(fact)로 인정하기에는 의심을 넘어 조작의 냄새가 너무도 짙습니다. 아무리 역사가 사실이라는 과핵(core)을 둘러싼 해석이라는 과육(pulp)이라고 하지만, 만주신문 기사가 박정희 개인사의 과핵이 되기에는 해석이라는 과육에서 너무 정치적이고 목적론적인 구린내가 나기 때문입니다. 만주신문의 기사는 박정희의 동료라는 유증선의 증언과 박정희의 군관학교 입학 일자를 억지로 꿰어맞춘 듯한 인상을 지울 수 없습니다.

첫째, 디지털 자료도 아닌 종이 자료인 만주신문이 박정희 혈서설이 제기된 몇십년 동안 나타나지 않다가 느닷없이 등장한 점입니다. 둘째, 민족문제연구소는 신문 사본만을 제시할 뿐 그 신문이 현재 어디에 어떤 형태로 보관되어 있는지 밝히지 않았습니다. 셋째, 1939년 3월 31일자 만을 사본으로 보여줄 것이 아니라, 다른 일자의 신문과 같이 철해진 상태인지도 확인해야 합니다. 그래야 최소한의 사료 조작의 의심에서 벗어날 수 있다고 봅니다.

만주신문 기사에서 혈서 편지를 받았다는 일자는 3월 29일인데 군관학교 1기 합격자가 발표된 2월 24일 이후입니다.그 당시 만주까지 편지가 가는 데는 아무리 길게 잡아도 일주일을 넘지 않았습니다. 합격자가 발표된 뒤에 지원 자격을 달라는 편지를 보냈다는 것이 상식적으로 납득이 되십니까? 군관학교 모집 요강은 9월에 공고되는데, 38년 5월에 공고되지도 않은 모집요강을 받들어 읽고 혈서를 썼다는 유증선의 증언은 명백한 거짓말입니다.

더욱 중요한 점은 만주신문 1939년 3월 31일자의 기사에서는 두번째의 편지라고 했습니다. 유증선의 38년 5월설은 위와 같이 거짓임이 밝혀졌고, 그렇다면 박정희는 1937년 4월 10일 문경공립심상소학교에 교사로 부임하자 마자 1차 지원 편지를 보냈거나, 그도 아니면 38년 9월에 모집 요강이 공고된 뒤에 연거푸 두번에 걸쳐 편지를 보낼 가능성을 점쳐볼 수 있지만, 수많은 박정희 전기나 폭로물 어디에서도 그런 점을 발견할 수는 없습니다.

가장 주목할 사실은 만주신문의 기사대로라면 박정희는 아직 설립되지도 않은 신경군관학교에 지원하려고 혈서를 썼다는 소설을 인정해야 합니다. 거의 모든 책에서 신경군관학교는 1939년 4월 1일에 설립되었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만주국군간행위원회(滿洲國軍刊行委員會)와 난성회(蘭星會)가 1970년에 발간한 <滿洲國軍> 910페이지에는 1939년 3월 10일 육군군관학교령이 재가, 공포되고 4월에 신경군관학교가 설립되었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전 합참의장 장창국의 <육사졸업생> 18 페이지에는 “만주군관학교는 1939년 장춘(신경)에 세워진 4년제 사관학교다.”라고 분명하게 기술되어 있습니다. 박정희 친일 추적에 전력 투구했던 오마이뉴스 정운현 기자의 책 <실록 군인 박정희>의 88페이지에도 “신경군관학교는 봉천군관학교의 후신으로 1939년 수도인 신경에 세워진 정식 4년제 사관학교였다.”라고 요지부동의 역사적 사실로 기록하고 있습니다. 최상천의 <알몸 박정희>도 마찬가지입니다.

1939년 3월 10일 육군군관학교령이 재가, 공포되어 4월 1일에 신경군관학교가 설립되었음은 더 이상 논란의 여지도 없는 역사적 사실입니다. 만주신문은 설립되지도 않은 신경군관학교에 입학하기 위해 박정희가 두번씩이나 편지를 보냈다고, 그것도 혈서까지 동봉해서 편지를 보냈다고 보도하고 있습니다. 결론입니다. 박정희가 혈서를 썼다는 만주신문의 기사는 조작의 의혹이 너무도 짙습니다. 조작의 형태가 밝혀지는 것은 사필귀정, 시간 문제입니다.
Commented by 악어의눈물 at 2009/11/07 19:36
군관 학교 갈려고 혈서를 썻든게 사실이래도 친일파라고 말하는것은 합당 하지 않다고 봅니다
당시의 조선은 조선이 아닌 일본국이었고 조선의 조선인이 아닌 일본신민 이었잖습니까

만주 군관학교에 입학하면 친일파라면, 일제시대 중학교 부터 전부 군복입고 총칼들고
군사훈련을 했습니다 그러면 군사훈련은 대한제국 국민을 위한 군사훈련일까요 ?
일본제국의 천황을 위한 군사훈련일까요? 일본제국을 위한 군사훈련이었다면
훈련받은 조선의 학생은 죄다 친일파로 보아야 형평성이 맞겠지요

또한 아침 저녁으로 신사참배하며 일본 천황한테 충성을 맹세한 조선인 전부다
친일파라고 해야 맞겠지요
Commented by 사랑받는사람 at 2009/11/09 02:49
안녕하세요. 저는 박정희 전 대통령의 친일논란에 관심있는 학생입니다.

박정희 전 대통령의 업적에 대해서도 잘 알고 있고 그분을 음해하려던 세력이 돌아가신 이후로도

있어왔음을 알고 있기에 이번 논란에서 그쪽 주장만 믿고 박 전 대통령을 욕하고 싶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능력은 없지만 젊고 무식한것 하나만 믿고 (^^;) 여기저기 인터넷으로 자료를 모으고
있습니다.

제가 일본사이트까지 가서 신문의 사실여부를 확인해볼 재간은 없지만,

좋은 블로그라며 추천받았기에 왔다가 정갈한 글을 보고 많이 배우고 갑니다.

제가 퍼가거나, 이 글을 다른 사람들에게 소개시켜 주어도 괜찮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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