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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안준하(張安俊河) 선생께서는 자원해서 입대하신 겁니다.

 
장준하 vs 박정희

누가 강제로 학병에 끌려갔대요? 어려운 집안사정 면해보려고 직접 귀국해서 여고생과 결혼한 뒤 출정하셨어요. 비록 혈서 입대는 아니었지만, 자원입대는 분명하죠. 평전도 안읽어보셨습니까? 자신은 피치못할 사정이었다고 하지만, 그건 그 양반 얘기일 뿐.. 평전을 보면 부모의 신변이 걱정되서 자원 입대했다고 나오는데, 그런 양반이 탈영을 왜 해. ㅋㅋㅋㅋ

1944년 일제의 패망이 코 앞에 다가오자 장준하 뿐만 아니라 많은 사람이 탈영합니다. 왜? 개죽음 당하기 싫으니까. 탈영한 사람이 귀국하겠어요? 아니면 전쟁터에서 숨어살겠어요? 목숨을 부지하려면 자신을 받아줄 수 있는 곳으로 가야겠지요. 그래서 간 곳이 광복군이에요. 거기서 총이나 몇번 쏴봤겠어요?

그리고 그양반 처음부터 박정희 안티는 아니었어요. 박정희가 쿠데타로 집권한 직후 그는 사상계 권두언에다 이런 글을 썼어요.

思想界 1961년 6월 卷頭言
 
[5.16혁명과 민족의 진로]

절정에 달한 국정의 문란, 고질화한 부패, 마비 상태에 빠진 사회적 기강 등 누란의 위기에서 민족적 활로를 타개하기 위하여 최후 수단으로 일어난 것이 다름 아닌 5.16군사혁명이다. 4.19혁명이 입헌정치와 자유를 쟁취하기 위한 민주주의 혁명이었다면, 5.16혁명은 부패와 무능과 무질서와 공산주의의 책동을 타파하고 국가의 진로를 바로잡으려는 민족주의적 군사혁명이다.

따라서 5.16혁명은 우리들이 육성하고 개화(開花)시켜야 할 민주주의의 이념에 비추어 볼 때는 불행한 일이요, 안타까운 일이 아닐 수 없으나, 위급한 민족적 현실에서 볼 때는 불가피한 일이다. 그러나 이번의 군사혁명은 정치권력이 단지 국민의 한 집단에서 다른 집단으로 넘어갔다는 데서 그친다면 그것은 무의미한 것이다.

혁명공약이 암암리에 천명하고 있듯이, 무능하고 고식적인 집권당과 정치가 수행하지 못한 4.19혁명의 과업을 새로운 혁명세력이 수행한다는 점에서 우리는 5.16혁명의 적극적 의의를 구하지 않으면 안 된다. 따라서 이러한 의미에서는 5.16혁명은 4.19혁명의 부정이 아니라, 그의 계승, 연장이 되어야 하는 것이다.

...(중략)...그렇게 될 때 국군의 위대한 공적은 우리나라 민주주의사상에 영원히 빛날 것임은 물론이거니와 한국의 군사혁명은 압정과 부패와 빈곤에 시달리는 많은 후진국 국민들의 길잡이요 모범으로 될 것이다.


비록 거사성공 후 군인 본연의 업무로 돌아가는 조건으로 5.16을 지지한 거지만, 그거야 말하기 나름이고..어쨌든, 4.19이후의 무질서와 혼란, 공산도배들의 침략을 우려하며 5.16 군사혁명(?)을 칭송한 건 사실. 이 놈의 나라는 인물이 김구 아니면 장준하 밖에는 없나?

덧. 자료출처는 我幸行님의 블로그

by 無名氏 | 2009/11/08 01:56 | 인.물.평.론 | 트랙백 | 덧글(4)

박정희考..유령부서에 혈서를 제출한 박정희

 

민족문제연구소가 박정희의 혈서지원설을 입증하기 위해 제출한 만주신문 사본의 기사에는 이런 내용이 있다.

"반도의 젊은 훈도로부터 29일 치안부(治安部) 군정사(軍政司) 징모과(徵募課)로 조선 경상북도 문경 서부 공립소학교 훈도 박정희군(23)의 열렬한 군관지원 편지가 호적등본, 이력서, 교련검정합격 증명서, 그리고 ‘한목숨 다바쳐 충성함 박정희(一死以テ御奉公 朴正熙)’라는 혈서를 쓴 종이와 함께 동봉된 등기로 도착해 담당자를 감격시켰다."

그러면 이 치안부 군정사 징모과라는 부서는 어떤 부서인가. 징모를 말그대로 풀이하면 징집과 모병을 뜻하는데, 만주국이 國兵法에 따라 징병제를 실시한 것은 1941년이다. 징모라는 말은 상당히 어폐가 있는 것이다. 만주국 발행 정부공보를 아무리 뒤져봐도 징모과는 찾을 수 없었다.

박정희가 혈서를 썼다는 1938년 9월 무렵 신경군관학교 모태인 중앙육군훈련처의 군관후보생 모집공고를 보면 치안부 군형과(軍衡課)에서 채용공고를 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여기서 민족문제연구소에서 제출한 신문기사의 진위가 또한번 의심된다 할 수 있겠다. 징모과라는 부서는 있지도 않은 유령부서이며, 징병제를 실시할 무렵에 征募課라는 부서가 존재했지만 이 또한 징모과와는 엄연히 다른 부서다.

치안부 개편뒤 군정사 소속 부서 : 
- 軍務課(編制、預算、補充、補給、計劃、憲兵事項,軍紀事項);
- 人事課(人事、恩賞、功績、指紋)...軍衡課의 후신
- 主計課(會計、預算、金錢出納)
- 經營課(需用、調辦、建築);
- 兵馬課(兵器、馬匹、獸醫)
- 醫務課(醫療、衛生)
- 法務課(法務、審判)
- 艦政課(見前)



판단은 알아서 하시라. 추가 자료는 조사되는대로..또 올린다.

by 無名氏 | 2009/11/07 20:06 | 인.물.평.론 | 트랙백 | 덧글(33)

박정희考...만주 신경군관학교 예과생도 모집공고의 건

 
박정희가 일계(日系) 군관모집요강을 받들어(?) 읽은 뒤 자격이 부달(不達)함을 깨닫고 혈서를 보내 지원을 청원한 바가 사실인지 우리는 좀더 확인할 필요가 있다. 앞에서도 언급했듯이 만주 신경군관학교에 일계(日系) 학생들이 최초로 입학한 것은 1940년 1월이었다.  자료를 찾아본 결과 일계(日系) 군관모집요강은 만계(滿系)의 경우와는 완전히 달랐다.

즉, 만계(滿系)의 경우 지원자가 거의 1만명에 육박한 까닭에 치열한 공개선발의 관문을 통과해야 했으나, 일계(日系)는 일본육군사관 정규채용 선발에서 탈락한 자 중 육군성의 추천을 받은 자만 입학이 허용되었으므로 애초에 박정희가 일계(日系) 군관모집요강을 받들어(?) 읽을 필요조차도 없으며, 어디까지나 박정희는 방원철이나 박임항처럼 만계 지원자 모집요강에 해당하는 신분이었다

자료를 찾아보니, 만주 신경군관학교의 일계(日系) 지원자 모집공고는 陸滿秘 공문 제1019호 (昭和 14年 11월 28일자)에 최초로 기안된 사실이 있다. 昭和 14年이면 1939년 11월 28일자를 말하는 바, 박정희가 3월에 받들어 읽은 일계 군관모집요강이란  타임머신을 타고 12월로 가서 가져오지 않은 이상 완전히 허구에 날조임을 알 수가 있다.
이 문서를 읽어보면, 일계(日系) 만주국군군관예과생도 지원자들은 어떤 자들이 지원할 수 있었고, 어떤 과정을 통해 선발되었는지 확인이 가능한데, 정규 일본육군사관학교 채용고시에서 탈락한 자들 중 비교적 우수한 자들을 만주국 치안부와 일본 육군성 교육총감부의 협의하에 지원이 가능하도록 모집요강을 만들었다고 되어있다. 즉, 박정희하고는 아무 상관이 없는 모집요강이 되겠음.

강덕6년(1939년) 8월에 기안된 만주군관학교예과생도 모집책자의 모습은 다음과 같이 생겼다. 박정희는 이 책자를 보고, 그해 10월에 시험을 쳐서 합격하고 1940년 4월에 2기생으로 입교한다.

나머지 자료는 계속 찾고 있으므로 확인될 때마다 별도의 포스팅을 올릴 예정..

by 無名氏 | 2009/11/06 23:02 | 인.물.평.론 | 트랙백 | 핑백(1) | 덧글(21)

박정희考...박정희 혈서 증거자료라는 것을 보고

 
민족문제연구소에서 만주신문의 "血書, 軍官志願"이라는 제하의 기사를 인용, 박정희의 혈서설을 뒷받침하는 증거라고 떠들고 있다. 과장과 왜곡이 난무한 일제시대 어용신문들의 기사에 대해 이렇듯 전폭적인 신뢰를 보이면서 작두날을 타는 무당처럼 신명난 살풀이를 하고 있다. 그런 기준이라면 학도병 궐기를 촉구한 기사가 무려 3번이나 나간 여운형은 왜 친일인명사전에서 뺐는지 모를 일이다.

일단 이 신문기사를 얼마나 신뢰할 수 있는지 의문이다. "29일 치안부 군정사 징모과로 조선 경상북도 문경 서부 공립소학교 훈도(교사) 박정희군(23)의 열렬한 군관 지원 편지가 호적등본, 이력서, 교련검정합격 증명서와 함께 '한목숨 다 바쳐 충성함 박정희'(一死以テ御奉公 朴正熙)라는 혈서를 넣은 서류로 송부되어 담당자를 감격시켰다"라는 부분을 보자.

여기서 29일이란 1939년 3월 29일을 뜻한다. 하지만 제1기 신경군관학교 예과생도의 합격자 발표는 그보다 앞서 1939년 2월 24일날 이미 만주국『政府公報』1459號를 통해 종료가 된 상태다. 그런데 합격자 발표일보다 한달이나 늦게 3월 29일날 박정희의 지원서가 송부되었다고 한다. 그렇다면 박정희는 언제 이 혈서편지를 보냈단 말인가.

조갑제의 "내 무덤에 침을 뱉어라"를 보면 유증선이 1938년 5월에 혈서를 썼다고 한다. 만주까지 우편이 송달되는데는 1주일이면 충분하다. 그렇다면 모집공고는 1938년 5월 이전에 있었다는 얘기가 된다. 1기 채용시험은 1938년 10월에 있었고 모집공고는 그 전에 있었을 것으로 추론한다면, 설령 유증선이 날짜를 착각했다 하더라도 이 신문기사의 신뢰성은 심히 의심이 간다.
또한 몇가지 문제가 더 보이고 있는데, 이 신문을 보면 "(전략) 일계(日系) 군관모집요강을 받들어 읽은 소생은 일반적인 조건에 부적합한 것 같습니다. 심히 분수에 넘치고 송구하지만.." 이라고 되어 있다.  그러나 신경군관학교 제1기 모집시에는 만계(滿系)만 모집했으며 일계(日系) 군관모집요강이란 없었다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

더욱이 조선계는 만주계에 속해 일본계 모집요강과는 해당사항이 없으며,  일본계가 신경군관학교에 최초에 입학한 것은 1940년 1월이다. (滿洲國軍刊行委員會, 滿洲國軍, 蘭星會, 1970, 619쪽). 그런 고로 이 신문기사는 사실과는 전혀 다르다.

덧, 일단 반론 자료가 나왔으므로 이전에 올렸던 "박정희 혈서설 떡밥은 여전히 유효한가"는 근거를 좀더 보강하여 재포스팅하고자 한다.

by 無名氏 | 2009/11/06 00:59 | 인.물.평.론 | 트랙백(5) | 핑백(3) | 덧글(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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